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혜경궁 홍씨 (문단 편집) === [[순조]] 시기 === 하지만 [[1800년]](정조 24년) 6월, [[정조(조선)|정조]] 사후 그녀의 큰 고난이 시작되었다.[* 그녀는 아들 [[정조(조선)|정조]] 사후에도 16년을 더 살았다.] 혜경궁 홍씨의 친정 [[풍산 홍씨]]와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 김씨]]의 친정 [[경주 김씨]]가 크게 대립했기에 [[정조(조선)|정조]] 사후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가 혜경궁 홍씨의 남동생 홍낙임을 [[신유박해]] 계기으로 처벌하려고 했다. 이에 혜경궁 홍씨는 [[단식]] 투쟁을 벌여가면서까지 반대했고 며느리였던 [[수빈 박씨]]도 합세해 둘이서 손자 [[순조]]에게 기대어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의 뜻을 일단 꺾었으나 결국 홍낙임은 [[유배]]를 보낸 후 [[사약|사사]]되었다. 당시 궁중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 하면 혜경궁 홍씨에게 문후(問厚)를 오는 이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. [[순조]]는 물론이고 [[왕대비]]인 [[효의왕후]]와 [[순조]]의 생모인 [[수빈 박씨]]마저도 [[대왕대비]]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의 [[눈치]]를 봐 혜경궁 홍씨에게 올 수가 없었던 것. 혜경궁의 친손자인 [[순조]]가 [[순원왕후]]와 [[결혼식|가례]]를 올릴 때도 혜경궁 홍씨는 폐백을 받지 못했다.[* 폐백은 [[순원왕후|신부]]가 [[결혼|혼례]](婚禮)를 마치고 [[조선/왕실|시댁]]에 와서 시부모(媤父母)를 비롯한 여러 시댁의 큰 어른들에게 드리는 첫인사를 말한다. 그러나 [[조선/왕실|왕실]] 법도에 의하면 남편인 [[사도세자]]가 [[조선/왕사|왕]]의 신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빈이 되는 혜경궁 홍씨 또한 [[세자빈|왕세자빈]]의 신분이고 법적으로 [[순조]]는 그녀의 손자가 아닌 윗동서 [[효순왕후]]의 손자이므로 폐백을 받지 않는 것이 맞다. 이 부분은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의 고집이 아닌 처음부터 시아버지 [[영조]]의 뜻이었으니 오해하지 말자.][* 당시 [[조선/왕실|왕실]] [[내명부]] 의례 서열은 예순대왕대비(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영조 계비]]) - 왕대비 김씨([[효의왕후|정조 비]]) - 혜경궁 홍씨([[혜경궁 홍씨|사도세자빈]]) - 가순궁 박씨([[수빈 박씨|정조 무품 빈]]) 순차대로 올려지는것이 법도였다. 폐백 대신 별도로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대왕대비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가 이 논란을 잠재웠다.] [[1814년]](순조 14년), 정적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은 뒤, 차례차례 혜경궁 홍씨의 [[풍산 홍씨|친정]]이 신원, 복권되었다. 또한 [[홍봉한]]의 [[죽음]]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, 이심도 등의 처벌을 [[순조]]에게 요구한다. 이심도는 결국 [[사형]]에 처해진다. 혜경궁 홍씨는 전에 [[1805년]](순조 5년)부터 담현증(痰昡症)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는데, 점차 병세가 깊어져 [[1815년]](순조 15년) 12월 15일, 81세의 일기를 끝으로 [[창경궁 경춘전]]에서 눈을 감았는데 손자 [[순조]]가 '헌경(獻敬)'이라는 [[시호]]를 올렸다.[* '헌경(獻敬)'의 뜻은 '''총명하고 예지(睿知)함'''을 '헌(獻)'이라 하고 '''밤낮으로 경계함을 일러''' '경(敬)'이라 하였다 한다.][* [[사료(역사)|사료]]에서 '혜경궁'을 '헌경빈(獻敬嬪)'으로 부른 경우가 거의 없어서 헷갈리기 쉬운데 당시 혜경궁은 여기에 생전에 받은 빈호를 합친 '헌경혜빈(獻敬惠嬪)'이라고 불렀다.] >'''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''' >---- >빈청(賓廳)에서 '''혜경궁'''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상계(上啓, 조정이나 윗 사람에게 여쭈어 봄)하였는데, >[[시호]]는 '''헌(獻)''' 【총명(聰明)하고 예지(睿知)함.】 '''경(敬)''' 【밤낮으로 경계(儆戒)함.】 이다. >---- >- '''《[[순조실록]]》 18권, 순조 15년([[1815년]], 청 가경(嘉慶) 20년) 12월 25일 (을해) 2번째기사'''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